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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고독와 운명에 맞선 개혁의 꿈, 정조 이산
 
 
 
국화도.jpg  
 

 

 

 

 

싱그럽던 화초들이 하나 둘 빛을 잃고 왔던 곳으로 쓸쓸히 돌아가기 시작하는 가을,

늦서리에 더욱 그 향을 천지에 내뿜으며 고아(高雅)한 빛깔을 오래도록 드러내는 꽃이 있다. 사군자 중 하나인 국화.

국화를 몹시도 사랑했던 육조시대(六朝時代)의 도연명은 벼슬길에서 낙향하자마자 제일 먼저 자신이 심어놓았던

국화를 찾으며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시를 지었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뜰 안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꿋꿋하구나.

 

 

워낙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유명하고 시에 표현된 국화의 모습이 인상깊다보니

국화는 선비의 지조와 은자의 상징이 되었고 문인들이 국화를 그릴 때 세속을 떠나 벼슬길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연명의 심정을 떠올린다고 한다.

위 국화 그림은, 두 살 때 이미 글자 모양을 만들고, 서너 살 때에는

날마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하고 놀았을 정도로 시와 그림, 문장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직접 전각을 새길 정도로 예술적으로도 소양이 풍부했던 조선 후기 정조대왕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인 국화도이다.

한 나라의 군주였던 그는 국화도를 그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고개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다가 지친 새들도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影翳翳以將入 (영예예이장입) 저녁 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나는 홀로 선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일부

 

 

귀거래사의 시구처럼 존현각 너머 먼 하늘을 바라보며 무소불포무소부재(無所不包無所不載: 천지가 위대한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포용하지 않는 것이 없고 싣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평소 그의 지론처럼

조선의 하늘을 돌고 도는 구름 한 조각, 지친 새무리까지 나라의 백성으로 긍휼히 여겨

만물을 포용하는 한 나라의 군주가 품을 수 있는 가장 원대한 꿈을 키웠던 것일까.

하지만 이내 암막한 현실에 홀로 서성이다 국화 한 송이에 마음을 실어보았던 것일까

 

 

임금은 하늘이 내린다는 옛말이 있다. 하늘이 관여할 정도로 한 나라 국왕의 자리는 절대적인 자리이자

백성을 살피고 나라는 이끄는 힘은 하늘이 가고자 하는 뜻을 읽고 이를 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 자격이 주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하늘이 내린다는 임금마저 당의 이익에 따라 자리를 세우고, 뒤바꾸고, 조용히 없애기조차 하였던

붕당정치의 횡포가 하늘을 찌르던 당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진 열 한 살의 어린 세손이 있었다.

바로 정조, 이산.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달려가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울부짖던 어린 정조는 조선 22대 임금이 되었지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처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정치상황과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노론세력의 목숨의 위협을 매순간 느끼며 온 몸으로 평생을 버텨야 했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두렵고 달걀을 포개 놓은 것처럼 위태롭다.”며 스스로 [존현각일기]에 적어놓은 것처럼

사도세자를 제거했던 그들에게는 그 아들인 정조가 버젓이 이 세상에, 그것도 언제든지 본인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임금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은 운명적 정적으로 팽팽하게 대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강했던 조선 후기 역사적 상황은 정조의 존재자체를 모순으로 몰고 갔다.

나이 열다섯에 예순여섯 영조와 대혼을 치룬 정순왕후는 정조의 할머니였지만 그녀를 배후로 하여

외척이 사도세자를 제거하는데 앞장섰으며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후에 정조 즉위에 공을 세웠으나 당시 홍씨와 그 부친 또한 노론 당론에 따라 사도세자 죽음에 가담한 차였으니.

 

 

궁의 사방이 온통 적과 원한관계로 둘러싸인 기구한 운명 앞에서 그는 한발자국도 물러서려 거나 돌아갈 수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돌아갈 곳이 없었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숨통 막히는 상황 속에서, 달이 차고 기우듯 변화무쌍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암살의 위협에서 벗어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오직 등잔 불 밝게 밝히며 서책을 벗 삼아 끝나지 않는 싸움을 견딜 뿐이었다.

 

 

내가 밤 잠을 안 자고 독서하다가 새벽닭이 울고 나서야 잠자리에 든 것이 몇 날 몇 밤이던가.”

 

한번은 한밤중까지 책을 읽다가 피곤이 몰려오고 졸음이 쏟아졌는데, 갑자기 한 줄기 닭 울음소리를 듣자

몽롱한 기운이 단번에 사라지고 청명한 기운이 저절로 생겨서 이 마음을 일깨울 수 있었다.”

 

매양 눈 오는 밤이면 달빛에 비추고 언 붓을 입김으로 녹이며 공부하는 한사(寒士)나 궁유(窮儒)를 생각하고는

스스로를 일깨웠다.”

 

 

세손시절 시강원의 스승에게는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천하의 일이 모두 하나의 나(:게으름)자로부터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게으름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가장 철저하였으며,

임금이 되어서도 매일 매일을 점검하고 왕의 자격을 되물었다.

 

 

증자가 매일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했다는 교훈은 학자의 실천하는 공부에 가장 긴요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 교훈을 가슴에 담아 왔다. 오늘날 [일성록]을 편찬한 것은 바로 그러한 뜻이다.

밤에는 하루의 일을 점검하고, 한 달이 끝날 때면 한 해 동안 한 일을 점검한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한 일을 실천하니

정령과 일 처리 과정에서 잘한 것과 잘못한 것, 편리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마음속에 깨닫게 된다.

이 역시 날마다 반성하는 한 가지 방도이다.”

 

임금은 사리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송 신종(神宗)이 처음에는 빼어난 자질로 인덕人德에 의한 태평성대를 계승하여

뜻을 세움이 높고 다스리기를 구한 것이 신속하였다. 그래서 옛 삼대(중국 고대의 , , )를 만회하는 정치를

머지않은 기간 내에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끝내는 금릉(金陵, 왕안석)에게 미혹되어 송나라의 국운이

장구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으니, 이는 다만 이치에 밝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다짐하면서 글을 쓴 것처럼 끝없는 수양으로 자신을 세우며 도탄에 빠진 왕좌의 운명과

성리학의 폐단에 빠진 조선을 공동운명체로 삼고 고금의 책 속에서, 선현의 글과 역사 속에서

오로지 새로운 길을 모색할 뿐이었다.

 

 

정조의 이러한 경명행수(經明行修)로서의 면모는 곳곳에 보인다.

한여름에 신하들이 더위를 피하여 시원한 곳으로 옮겨 책을 읽으라고 권했으나

지금 좁은 이곳을 버리고 다른 서늘한 곳으로 옮기면 또 거기에서도 참고 견디지 못하고 반드시 다시 더 서늘한 곳이 생각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만족할 때가 있겠는가.”라며 스스로를 극복하는 것을 만족으로 삼았다.

 

 

정조는 학자 군주로서 세손시절부터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의 경연을 통해 학문을 넓혀갔으며

독서기를 만들어 읽은 책을 분류하고 편찬자와 독후감을 꼼꼼히 기록하기까지 하였다.

즉위 초 선왕의 뜻을 계승한다는 취지 아래 선왕의 책과 글씨, 초상을 보관하는 전각인 규장각을 설립하였고

규장각은 후에 선왕의 유물을 보관하는 왕실도서관의 기능을 뛰어넘어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모하며

정치의 중흥을 꾀하게 된다.

 

김홍도-규장각도S.jpg  

:: 규장각도(奎章閣圖) | 김홍도 作, 1776, 견본채색, 144.4*115.6cm

 

 

그 중심에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지만 서얼 출신으로 신분제의 얽매여 등용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지식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리수 등의 규장각의 검서관들이 있었다.

 

 

정조의 능력위주의 인재등용 전까진 양반 사대부인 나라 조선에서 서얼들의 벼슬길은 전무하였기에

그들의 생활은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을 달고 살며 오로지 독서만이 낙이었으며

이덕무는 사람들이 간서치(看書癡 : 책만 보는 바보)라 불렀으며 스스로 간서치전(看書癡傳)라는 책을 내기까지 했다.

 

 

"지난겨울 내 작은 초가가 너무 추워 입김이 서려 성에가 되었고, 이불깃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내가 게으른 성격이지만 밤중에 일어나 창졸간에 [한서] 한 질을 이불 위에 덮어서 조금 추위를 막았다.

이러지 않았다면 후산(後山)의 귀신이 될 뻔했다."

 

첫째, 배가 고플 때 책을 읽으면 소리가 두 배는 낭랑해져서, 담긴 뜻을 음미하느라 배고픈 줄도 모르게 된다. 둘째, 조금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 흐르고 돌아 몸속이 편안해지니 추위를 잊기에 충분하다. 셋째, 이런저런 근심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이 글자에만 쏠려 마음이 이치와 하나가 된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넷쩨, 병으로 기침할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시원스레 통해 아무 걸림이 없어져서 기침소리도 문득 멎는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배부르지도 않으면 마음이 아주 화평해지고 몸도 건강하다. 여기에 더해 등불은 밝고 창은 환한데 훌륭한 책이 앞에 놓여 있고 책상과 자리가 깨끗하기까지 하다면 읽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쓰러져 가는 집에 살았던 유득공 또한 비록 끼니는 자주 걸렀어도 기색은 태연자약했다." 라고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고 있었다.

 

 

이처럼 신분상 쓰임을 받지 못하는 서얼출신이었지만 정조는 이들을 마치 벗처럼 대하며 우대하여 실력을 키워갔으며

이후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하게 된다.

당시 집권층인 노론의 차별과 반발은 지극히 짐작한 바였는데 정조가 이들을 총애하여 가까이두자 예상처럼 탄핵이 들어왔다. 국가 행사장에서 당상관만이 앉게 되어 있는 자리에 박제가가 앉는 등 불손하게 처신했다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배우로서 기르고 있는 것뿐이니 너무 문제 삼지 말라.”

 

탄핵안을 무마한 정조는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을 불러 앉히고는 오히려 우스갯소리로 그들을 달랜다.

 

박제가 자네 이름자의 는 무슨 쩨 자며, 이덕무 자네 이름의 은 무슨 덩 자며,

유득공 자네 이름의 자는 무슨 꽁 자인가?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넘어 그들과 인간적으로 얼마나 친밀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후에 박제가는 중국인 진전에게 정조에 대해 이렇게 고할 정도였다.

 

 

박제가.jpg  

:: 박제가(1750~1805)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서얼출신으로 사회적인 차별 속에서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반대하는 실학사상을 전개하였으며

백탑파의 일원으로 연암 박지원으로 스승으로 삼아 학문에 깊이 들었다.

명재상이었던 채제공의 배려로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서 '북학의'라는 책을 저술하여

현실의 문화와 생활전반에 대한 개혁론을 펼쳤다.

 

 

"학문은 조아하고 견문이 넓어 공자맹자의 연원을 직접 접했으며또한 공손하고 검박하여

아래 사람을 예로 대했으며 물결이 흐르듯이 선()을 좇았으며, 일찍이 초야의 선비의 이름을 알아

과거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발탁하여 등용하고 요직을 제수했다.

그러니 군신(君臣)간의 지우가 고금에 드문 일이다."

 

또한 신분제의 차별로 고통을 겪었던 실학자답게 백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그가 꿈꾸는 세상은 이랬다.

 

신이 원하는 바는 이 고을의 백성이 편안히 살면서 생업에 즐겁게 종사하고, 붓도랑과 밭고랑이 제도에 맞으며,

가옥을 깨끗이 정비하고, 백성들의 용모가 단정하고, 말에 신의가 있으며, 기물이 견고하고 의복이 단정하며,

수목이 무성하게 자라며, 육축이 잘 번식하는 것입니다. 남녀가 나태하지 않아서 각자 맡은 임무를 다하고,

공인과 상인이 모여들고, 도적들이 사라지고한 개의 현이 이렇게 되면 온 나라가 이렇게 되어

풀이 바람에 쓰러지고 역졸이 소식을 전한 것처럼 바람같이 응할 것입니다.

신은 아침에 이를 보면 저녁에 죽어도 아무 유감이 없습니다.”

 

 

박제가의 이 같은 바람에서 보여 지듯이 당시의 조선은 사대부 사회의 모순과 역기능이 팽배한 상황이었고

이들의 출중한 학식을 바탕으로 시대적 필연으로 발생한 개혁 의지는

정조와 함께 한 나라의 원대한 개혁을 꿈꾸게 된다.

(다음달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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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 영화지기 2014.10.11 15:53:48
    글이 너무 좋아서 퍼갈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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