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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鄭敾)

 

 

 

겸재-정선s.jpg  

 

  

입가가 절로 흐믓해지는 말이 있다.

, 낡은 서책, 비 갠 오후, 정갈한 집, 몽당붓, 편지.

 

이 단어들에서 오래된 냄새가 난다.

코끝을 자극하는 싸하면서 묵직한 먹,

가슴속까지 은은하게 번져오는 찻잎,

바람, 물과 맨살 맞대며 버틴 단단한 돌,

인고의 시절을나란히 곁을 지켜온 막역한 우정,

시 한수에 묻어나는 못내 아쉬움

의 냄새가 그러할까.

 

위에 열거한 말들과 오랜 냄새를 한 번에 보여주는 그림 한 점이 있다.

 

   

 

인왕제색도s.jpg    

[인왕제색도]_정선(鄭敾)| 지본담채(紙本淡彩) 79.2x 138.2, 국보 제216

 

 

 

웅혼하고 힘찬 필치에 은은히 피어오르는 안개로 가리운 시적 정취는 화폭에 외홀로 남겨진 가옥으로 초대해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여생을 함께 한 만남과 그들이 공존했던 시간과 장소를, 죽음이 임박한 지인에게 보이고자 짐작컨데 빠른 붓놀림으로 단박에 숨 몰아치며 완성한 그림, 인왕제색도! 지방 관리를 맡았을 시기 말고는 대부분 백악산과 인왕산 인근에서 살았다고 하니 서로의 곁을 지키며 사시사철 운무 깔린 산새를 얼마나 두고두고 보아 왔던가. 시 한수, 그림 한 점 오가며 어찌나 아껴왔던가.

남겨진 그림 한 폭은 구구절절 말이 없지만 그들의 삶이 어찌나 멋스럽고 조우가 부럽던지 300년 전 그 속에 들어앉아 턱을 괴고 그들과 마주한다.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

 

 

그들이 북악산 산등성이 밑에서 일찍부터 나누었던 교우 때문인지 위엄 있고 장쾌한 인왕산의 무정한 바위마저 호젓하고 살갑게 느껴지기까지 하니

몸이 둘일 뿐 정작 하나였던 그들의 관계는 학산 신돈복이 학산한언에 남긴 기록에도 나타난다. 미루어보아 겸재의 그림은 진즉에 중국에서도 그 가치를 대단히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신돈복 : 당시 백악사단의 일원으로 이들을 존장으로 모시고 살았던 백록의 6세손)

 

 

정겸재 선은 자가 원백이다.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산수에 뛰어나서 세상에서 일컫기를 300년 이래에 으뜸가는 그림이라도 한다. 그림 구하려는 이들인 삼대처럼 밀려들어도 그에 응하여 게을리하지 않으니, 나 역시 북리에서 같이 살아 그 산수화 30여 장을 얻어서 항상 보배로 사랑하고 있다.

하루는 내가 사천 이공을 찾아가서 그 시렁 위를 보니 당판아첨이 쌓여서 벽을 두르고 있다. 내가 이르기를 척장께서는 당판서를 어찌 이리 많이 가지셨습니까. 하니 이공이 웃으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게 1500권인데 모두 내가 사들인 것이네.

그리고 나서 또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이 정원백에서 나온 것임을 남이야 누가 알겠는가. 북경 화사에서 원백의 그림을 심히 존중하여 비록 손바닥만한 종이 조각 그림이라도 비싼 값으로 사지 않는 경우가 없다네.

내가 원백과 가장 친한 까닭에 그 그림을 얻은 것도 가장 많은데 매양 연경으로 가는 사신 행차에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보내 볼 만한 책을 사오게 했더니 이렇게 많이 모아졌네 라고 하신다. 나는 비로소 중국 사람들은 진실로 그림을 알아보며 우리나라 사람처럼 다만 이름만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폭 어디에 인적 없어도 시화로 형영상수(形影相隨:형상과 그림자처럼 서로 따름) 하던 그들의 자화상은 오래도록 이사천댁 취록헌에서 조석상봉(朝夕相逢)하여 웃고 벗하며 시와 그림을 나누며 노닐고 있지는 않은가.

(*사천 이병연의 가옥은 취록헌으로 정겸재 댁은 인곡정사로 불리었다.)

 

 

진경산수화의 개창자인 겸재 정선(1676(숙종 2)-1759(영조 35)).

후대의 김홍도와 함께 우리나라 회화에 큰 획을 긋는 두 거장으로 겸재는 조선시대의 화성(畵聖)으로, 단원은 조선시대의 화선(畵仙)으로 불리운다. 화가 겸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학자인 김용준(1904-1967)겸현이재와 삼재설에 대하여, 조선시대 회화의 중흥조에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만일 겸재가 없었더라면 후일에 단원도 없고 혜원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러한 점으로 본다면 겸재의 그 독특한 준법은 오로지 사생에서 생겨난 고귀한 수확이요, 그것이 다소의 고법이 윤색되어 북파적인 인상이 보이면서도 전연 새로운 민족적 특질을 구비하게 된 것일 것이다.

 

 

조선 후기 진경시대 문화를 주도하던 영조대왕이 반드시 이름이 아닌 호로 겸재를 불렀다고 하니 그에 대한 존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숙종부터 시작된 진경시대는 중국의 자연이 중심이 되던 시문학에서 화제를 찾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조선의 산천을 소재로 우리 것의 고유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한국적 화풍이 전개되는 진경문화가 꽃피기 시작한다.

그 절정에 시와 그림의 양대 거장인 겸재와 사천 이병연이 있었다. 지금의 청와대 서쪽 별관 부근 북악산 밑 한동네에 이웃하며 평생지기 죽마고우이자 스승인 김창흡 밑에서 동문수학하던 사이였다. 겸재가 진경산수화로 문화를 선도해 갔다면 사천은 일만 삼천 수가 넘는 시작을 한 진경시의 거장이었다. 겸재와 사천은 노경에 이르러서도 지척의 이별이 아쉬워 그림과 시를 서로 바꾸어 보자는 시화환상간의 약조를 하게 되어 진경 서른 세 폭을 그려내는 진경시화의 합벽첩合壁帖인 경교명승첩이 탄생하게 된다.

 

 

 

삼승정s.jpg  

[삼승정]_정선(鄭敾)| 비단담채(紙本淡彩) 39.7x 66.7,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수록

 

 

귀록 조연명은 서원소정기<삼승정>을 언급하며 겸재와 사천을 등장시켰다.

 

 

아득한 서원 정자 세상 밖에 있는데, 꽃 심어 줄 짓고 연못을 새로 팠다.

사천의 아름다운 시와 겸재 그림을, 좌우에 맞아들여 주인 노릇 한다.

 

 

이병연의 전별시에도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자네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이 될 터인데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진 보이누나

강서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소동파가 극찬한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畫 畫中有詩)의 시불(詩佛) 왕유를 들어 떨어지는 아쉬움을 토로하더니 이렇게 약조하기로 한다.

 

 

겸재 정선과 더불어 시가 가면 그림이 온다는 기약이 있어

약속대로 가고 오기를 시작하였다.

 

내 시와 자네 그림 서로 바꿔 볼 적에

둘 사이 경중을 어찌 값으로 따지겠나

시는 간장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두르는 것

모르겠네, 누가 쉽고 또 누가 어려운지!

 

 

시에서 이병연, 그림에서 정선이라는 말이 통용화 될 정도로 시와 그림 곳곳에 등장하며 이름을 날렸던 사천과 겸재는 위 시에서 나타난 것처럼 시화첩에 천금무전(千金勿傳:천금을 준다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의 인장을 서로 찍어 후손에게 전했을 정도이니 그들의 교우가 얼마나 깊었던가!

 

 

우리나라 곳곳의 자연경관의 수려한 자태가 겸재에 의해 화폭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면서 그만의 독자적인 한국다운 화풍은 실제 경관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서자연이 존재해 왔던 세월을 더듬으며 자연과 함께 숨 쉬며 살아온 인간의 역사와 삶까지 고스란히 담아 존재적 의미까지 부여하는 새로운 화풍으로 표현된다.

인왕제색도 또한 평생을 가까이한 오랜 지기와 함께 살아온 삶의 궤적, 눈앞에 닥친 벗의 임종을 바라보며 통탄의 마음으로 붓을 긋지 아니하였던가.

 

 

겸재라는 호는 주역(周易)에서 따온 것으로 화가 이전에 선비로서의 겸재를 깊이 이해하였던 평생 기지,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화가의 명망 때문에 주역에도 정통한 성리학자이기도 했던 그의 학문이 가려진 것을 애석해 하기도 했다. 겸재, 매우 겸손한 선비라는 호의 의미처럼 그는 끝없이 학문을 추구하는 살아있는 선비가 되고자 했는데 실제 도설경해圖說經解라는 저서를 남길 정도로 주역에 정통했던 대가였다.

 

 

독서여가도2.jpg   

[독서여가도]_정선(鄭敾)| 견본담채(絹本淡彩) , 39.7x 66.7㎝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수록

툇마루에서 한가로이 볕을 쬐며 난을 바라보는 겸재의 모습은 영락없는 선비의 자화상이다.

 

 

성리학의 근본 경전이자 천지만물의 변화하는 원리와 음양의 조화를 풀이한 주역을 즐겨 학문하며 하늘과 땅의 조화, 인간의 삶의 어우러짐을 붓으로 담아내었으니 그가 가슴으로 품은 조선의 산천은 그야말로 화가의 혼과 정신, 세계관을 그대로 화폭으로 옮긴 또 하나의 우주가 아니던가.

 

 

은암동록.jpg  

[은암동록]_정선(鄭敾)| 지본담채(紙本淡彩), 31cm x 29.8cm

 

86세까지 왕성한 필력을 쏟았던 겸재.

노안이 오자 안경 두 개를 포개어 쓰고 그림을 그렸다는 노장은 76세에 그렸다는 인왕제색도에서도 무르익은 대가의 경지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정선 노인이 밤중에 호흥豪興이 일어

문 열고 쳐들어와 벼루 찾는다

 

얕고 깊게 먹을 갈아 신운神運에 맡기고

좌우에서 등을 들어 눈 밝혀준다.

 

육필을 함께 몰아 바람 천둥치듯 하니

세 문짝 모두 젖고 파도가 친다

 

내 방은 이로부터 낯빛 더하고

예원藝苑에 거연居然히 호사好事를 이뤘네

 

                                                   -조영석 겸재정동추애사」 『관야재고

 

 

 

한 폭의 그림 앞에서 벼락 맞은 듯 전신에 흐르는 전율로 숙연해지는 까닭은 국보 제216호라는 빛나는 문화유산이라서는 아닐 것이다.

평생 쓰고 버린 몽당붓이 붓 무덤을 이룰 정도로 부단히 연구하며 조선 산천을 품에 안고 자신의 독보적인 화풍을 만들어 갔던,

그의 겸허한 노력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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